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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암은 조선 선조 13년(1580) 경에 국문학에 기여한 바 크며 문학가요 정치가였던 송강 정철이 강원도 감사로 있을 당시에 관동팔경을 두루 돌아보고 도내를 순유하게 되어 영월군 상동에 있는 고두암(꼴두바위)앞에 이르게 되었다. 좌우의 높은 산이 굽어보는 계곡 삼각지대 중심부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거암은 그 생김새가 마치 신선같기도 하고 부처 같기도 하며 기기묘묘한 꼴이 심상치 않고 더욱 심산유곡의 고요한 풍취는 신령이 있는 듯하여 정철은 목욕재개한 후에 의관을 바로하고 “꼴두바위”앞에 나가 국궁 재배하니 옆에서 모시던 사람들이 괴암을 숭배하는 이유를 물었다.
정철은 충암괴석이 비록 입이 없어 말은 못하나 앞으로 몇백년 후에는 세상 사람들의 숭배를 받을 “활인영석”이라고 밝힘으로써 명암임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과연 이 말과 같이 1923년에 이곳에서 중석광산이 개광되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도시를 이루었다.
언음상으로 본 “꼴두바위”는 한문으로 “고두암”으로 표기하는데 우리말 이름이 먼저 생겼는지 한문이름이 먼저 생겼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조사한 바에 의하면 “꼴두바위”가 먼저라고 한다. 그것은 순수한 우리말은 한문으로 표기할 때에는 대체로 우리말이나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유학자들에 의해서 중국의 지명을 따서 붙인 것이 8할이 넘는다. 그런데 이 꼴두바위를 고두암이라 명명한 것은 한일 합방후에 조선총독부의 지세조사에 의하여 지도상으로 표기할 때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고두암”이라 명명한 것은 우리말로“꼴두바위”와 근사음인 동시에 이 바위의 높고 곧고 곱게 생긴 모습과 기암이 노출된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말의 “꼴”이란 형상을 말함이요 “두”라함은 한문에서 말하는 “두”혹은 두를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두”는 두목이나 위나 머리를 이르는 것이며, 또 “두”는 남북을 가리키는 별의 이름을 말한다. 따라서 이는 대체로 우두머리 가는 형상을 가진 바위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꼴두바위는 마치 금강산의 만물상과 흡사한 경치로도 유명하다. 이 거암은 대한중석 상동광업소 입구에 위치해 있어 더욱 유명해졌다.
상동 중석광업소 우측 골짜기에 있는 화강암으로 된 큰 바위이다. 바닥의 넓이는 천여 평이 넘고 높이는 큰 빌딩 정도의 웅장한 벼랑이 치솟아 있으므로 `꼴두바우'라 한다. 예전 사람들은 상동을 꼴두바우라고 불렀는데, 조선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鄭澈)이 이 바위를 보고 "먼 훗날 이 큰바위 때문에 심산계곡인 이곳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바위를 우러러 볼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예언대로 상동중석이 번성했을 때는 수만 명의 인구가 이 바위를 우러러보며 살았었다.
옛날 구래리에 젊은 부부가 주막을 차리고 나이 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손님들이 많아 먹고 살 만큼의 돈은 벌었으나 한 가지 걱정은 자식을 갖지 못한 것이었다. 며느리는 온종일 찾아오는 손님의 뒤치다꺼리에 지쳐 쉴 때가 되면 시어머니는 그때부터 자식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에 대해 구박이 시작되었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는 도승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말하였다. "스님, 저희 부부가 결혼한 지 10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제발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며느리의 말을 들은 늙은 스님은 "꼴두바우에 올라가서 석달 열흘동안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얻을 수 있으나 그 대신 주막집은 손님이 끊겨 당신네 집안은 다시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요."
이 말을 들은 며느리는 자식을 얻고자 하는 일념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꼴두바우에서 치성을 드렸다.
시어머니는 손자는 얻을 수 있으나 또 다시 가난한 생활을 해야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며느리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겨 며느리에게 밥도 주지 않고 온갖 구박과 학대를 다하였다. 이러한 시어미니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꼴두바우에다 치성을 드리던 며느리는 결국 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자식에 대한 한을 간직한 채 죽고 말았다.
그 후 하늘에서는 이 여인 대신 꼴두바우로 하여금 중석을 잉태하게 하여 한을 풀어주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마을 사람들도 그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돌로 여자 모양의 꼴두각시를 깍아놓고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일제때 일본사람들에 의해 파손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