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축제의 축(軸)인 '단종문화제'와 '김삿갓문화큰잔치'의 주인공인 '단종'과 '김삿갓'은 영월의 대표적인 이미지 메이커이다. 특히 단종(端宗)은 한국사의 페이지를 장식한 비극적인 눈물영웅으로서 모든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기에 '영월'의 이미지는 그로부터 부상(浮上)하고, 영월의 상징명인 '충절의 고향'도 그로부터 기인하였다.
단종은 지존(至尊)의 몸으로서 영월에서 사사(賜死)된 후 제명되고 후에 복권, 분묘수축, 치제, 사당건립, 복위 등의 순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런가 하면 민중쪽에서는 서낭신이나 산신 등동제의 주신(主神)으로 등장하고, 무당의 몸주 나아가 지역의 수호신으로 좌정하고 있다. 단종은 몸은 죽었지만 혼은 결코 죽지 않은 것이다.
본고는 단종의 부활을 평면적으로 해결한 관변(官邊)쪽이 아니라 단종의 비극적인 삶을 자신들의 삶의 일부로 삼고 살아온 민중(民衆)쪽의 시각에서 단종의 부활을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단종에 대한 민중의 정서를 이해하고 동시에 지역민의 의식과 신앙을 파악하는 대안이다.
1. 단종신앙의 생성모티브
주지하다시피 단종(1441~1457)은 영월에 귀양와서 불행하게 요졸한 조선조 6대 임금이다. 그는 세종의 손자이며 문종의 아들로서 왕세손(8세) - 왕세자(10세) - 왕(12세) - 양위(15세) - 노산군으로 강등(16세) - 영월로 유배 - 서인으로 강등 - 죽음(17세) 등 숨가쁜 역정을 겪고서 억울하게 죽은 한(恨)의 인물이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간이 늦어져서 일을 그르칠까 발을 구르면서 급히 재촉하였다. 도사가 불가피하게 들어가서 뜰 가운데 부복하니 노산군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마당 가운데로 나와 온 까닭을 물었으나 금부도사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평소에 노산군을 모시던 공생(貢生)이 자청하여 한가닥 활줄로 목을 매여 죽였다."
단종은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살해를 당하였든 아니면 사약을 받았거나 스스로 자살을 하였거나 간에 어린나이에 지존의 자리를 빼앗기고 한을 품고 죽었다. 또 자기로 인해 수많은 신하들과 가족들이 죽거나 노비가 되고 유배되었으므로 그 한은 이 세상 어떤 원한보다 크고 진하였음이 틀림 없다. 게다가 그의 원혼이 특히 한스러운 바는 자신의 이름이 역사의 표면과 종중에서 삭제당한 사실일 것이다.
"노산군 및 이유(금성대군), 이영, 이어, 이전, 정종 등은 그 죄가 종사와 관계되므로 속적을 마땅히 끊어야 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자손까지도 종친에서 삭제하고 부록 같은 데에 기록하게 하소서."
단종이 사사된 지 한 달 후인 11월 18일에 조정에서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자손들을 종친에서 삭제하고 부록에만 기록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당시 종시부에서는 위의 글로써 청하여 그대로 시행하였으며, 아울러 세조의 태실과 함께 있다는 명목으로 성주 선석산에 있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태실마저 철거하여 버렸다.
그후 단종이 서거한 지 60년이 지난 중종11년(1516)에 노산군으로 복권이 되어 분묘가 수축되고 비로소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 곧 중종은 예조에 명하여, "노산군을 관에서 치제하되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고, 제사지내는 절목도 마련토록 하라."고 하였다. 광해군 원년(1609)에는 묘택 옆에 사당을 세우고, 단종이 승하한 후 241년이 되는 해인 숙종24년(1698) 10월에 이르러서야 시호를 '순정안장경순대왕(純定安壯景順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복위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단종을 문화영웅화하여 '단종문화제'를 거행하고 단종제향[告由祭]을 유교식으로 올리는데, 영월ㆍ정선ㆍ평창군의 군수가 헌관으로 배향한다.
이상은 단종에 대한 관변쪽의 대처방식이었다. 그러면 민중쪽의 대처방식은 어떠하였을까? 단종의 비극은 충효와 우애를 이념으로 삼고 살아온 민중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었으므로 그들의 가슴속에도 한으로 살아 남았다. 그래서 민중들은 단종을 태백산의 산신으로, 사당과 제단의 신주로, 그리고 영월을 중심으로 한 인근의 태백과 정선 및 단양과 봉화에 이르는 지역에서 수호신으로 모시었다.
사람들은 효과적인 생존을 위해 초월적인 신령의 힘을 필요로 하거나 초월적인 인물을 숭상하고 영웅의 언행을 이데올로기화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과 결과는 신앙화되어 축제와 제의로 나타나고 그것을 통해 무사안녕과 풍요를 보장받는다고 믿는다. 단종신앙권에 속한 주민들은 그들의 삶의 형태 하나하나에도 부지불식간에 신격화된 단종을 통해서 의식과 정서를 통제받고 나아가 무사안녕과 풍요를 보장받는다고 믿어왔다. 그 과정에는 단종이 군왕신(君王神)이기 때문에 '신통이 세다'는 공리성도 작용하였으리라.
민중들은 자신들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항상 초월적인 존재나 영웅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 민중의 영웅들은 승리하는 영웅이든 패배하는 영웅이든 이야기로 살아남아 구비전승한다. 어떤 영웅은 축제와 제사의 대상신으로 추앙을 받는다. 우리의 구비전승적 문화영웅에는 단종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 박문수, 자린고비, 강감찬, 최영, 사명당, 마의태자, 김삿갓, 남이, 범일국사 등 부지기수로 많다. 그런데 이 중에서 민중의 신격으로서 자리잡고 제사를 받고 있는 인물은 단종, 최영, 마의태자, 김삿갓, 범일국사, 남이, 명성황후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사명당이나 박문수등은 사찰이나 서원 또는 문중에서 세운 사당의 제향을 받지만 민중에게서 신격으로 숭배 되지는 않는다.
신격(神格)으로 자리잡은 이상의 인물들은 둘로 구분되는데, 범일국사 대 그외의 인물이다. 이들의 차별성은 성공한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단종, 최영, 남이, 김삿갓, 명성황후 등은 모두 불행하게 죽은 '눈물영웅'들이다. 대관령국사서낭인 범일국사의 경우는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처럼 성공한 인물인데 이는 처음부터 강릉단오제가 관변에서 주도한 축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능하다. 또 단종은 관변의 제사인 고유제를 받는 인물이지마는 이보다 먼저 민중들로부터 신령으로 숭배되어 제사를 받았다. 한국인은 눈물 영웅의 한을 풀어주어야 '평안하다'는 정서를 지닌 사람들이기에 가장 진한 한을 지닌 단종을 모시어 봉제(奉祭)함은 자연스런 발상이다. 게다가 단종에 대한 제사는 그가 한때 국부(國父)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부모의 조상제사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 단종신앙의 형태
단종에 대한 신앙은 제의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단종제, 서낭제, 산신제, 한풀이굿 등이 그것이다. 단종을 모신 당집도 단종각, 산신각, 산령각, 산제당, 성황당, 서낭당 등으로 명칭이 다양하다.
장릉에서의 단종제(고유제)는 관변쪽의 유교식 제향으로서 종묘제례의 법식으로 지낸다.
공주 계룡산의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서 올리는 단종대제는 단종 탄신일인 음력 3월 보름과 승하일인 10월 24일에 사단법인 '숙모회'의 2백여 인사와 문중의 후예들이 모인 가운데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고,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끝까지 세조에게 대항한 충신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의이다. 숙모전 단종대제의 시작은 이렇다.
"숙모전에 단종을 모시게 된 것은,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고 몸을 피한 엄흥도가 단종의 어의를 가지고 김시습과 함께 공주의 동학사로 가서 조상치ㆍ조여ㆍ정지산 등과 더불어 육신단(六臣壇)위에 品자 형태의 제단을 만들고 거기에 어의를 모셔놓고 1456년에 초혼제를 지내면서 비롯하였다. 이듬해 세조가 이곳에 들렀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하여 억울하게 죽어간 명단을 8폭비단에 적어 유불(儒佛)이 공사(供祀)토록 하고 사패(賜牌)하였다. 초혼단은 영조 때 불탔으며, 고종(광무) 8년(1908)에 민화화상이 재건하여 숙모전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단종의 묘택인 장릉은 사람들의 참배처이다. 명당으로 알려진 장릉은 신성성과 영험성이 구비전승하고 있다. 어느 비석인지는 모르나 제대한 군인이 용하다는 말을 듣고 미신이라 하여 비석에다 오줌을 깔겼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시대에는 장릉쪽으로 걷거나 또 버스를 타고갈 때 모자를 벗었다가 다 지나가면 모자를 썼다고 한다.
장릉 옆에는 단종의 극락왕생을 비는 보덕사라는 원찰이 있다. 또 위쪽에는 금몽암(禁夢庵)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단종이 궁궐에 있을 때 이곳에 대한 꿈을 꾸게 된 인연으로 지었다고 전한다.
단종신은 영월의 영모전 서낭당을 비롯하여 청령포와 하동면 내리 및 정선군 여량리의 서낭당에 모셔지고 있다. 영월읍내의 영모전은 민간신앙으로서의 단종신앙의 구심체이다. 고을 주민들은 단종의 영혼을 이 영모전에 모셔 놓고 항상 단종을 경모하면서 단종의 보호를 받고 살아간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주민들 가운데는 가정에 불행한 일이 있거나 무슨 소원이 있을 때면 남몰래 영모전을 찾아가 빌기도 하고, 음력 설날이면 치성 기도와 분향을 드린다. 특히 단종이 승하한 음력 10월 24일 새벽에 제일 먼저 제물을 가지고 분향한 사람이 그해에 운수대통하고 소원성취한다 하여 앞을 다투어 분향하는 사람들로 붐비었다.
단종은 죽어서 태백산의 산신이 되었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17세에 사약을 받고 승하하던 날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秋益漢)이 깊은 산에서 채집한 산머루를 가지고 단종에게 올리고져 시내에 있는 관풍헌을 향하여 오는 도중에 백마를 탄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추익한은 머루를 단종에게 올리면서 "어디로 행차하시느냐"고 물으니 "태백산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의아하여 급히 부중에 들어와 단종의 거소에 가보니 이미 변을 당한지라 다시 단종을 만났던 계사동까지 와서 단종을 따라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백산에 사당을 세우고, 어려울 때나 명절 때에 촛불을 밝히고 소원을 빌고 있다.
단종이 죽어서 산신이 되어 태백산으로 가는 도중의 마을들로 추정되는 장소들 곧 영월읍 - 두평리 - 석항 - 수라리재 - 녹전리 - 이목리 - 직동 - 상동읍(고두암) - 어평리 - 만항재 - 소도당골 - 태백산 등의 인근 마을에서는 단종을 동신(洞神)으로 모시고 산신제를 지내는 마을이 많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의 비각에도 등불을 밝히고 발원하고 치제한다.
단종의 원혼은 무녀들의 몸주로 강림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무녀 의한 '단종대왕한풀이굿'이 벌어진다. 단종제 때마다 장릉에서 펼치는 강귀옥 무녀의 굿판이 대표적이다.
한편, 군왕인 단종의 양위와 죽음은 당대사회의 이데올로기였던 충(忠)에 위배되므로 수많은 충신들이 대의명분에 따라 세조에게 저항하고 죽음을 당했으니 사육신과 생육신이 대표적이다. 영월에서는 엄흥도와 추익한을 비롯하여 단종의 뒤를 따라 목숨을 버린 궁인들이 충신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도 '충신제향'이라 해서 단종처럼 숭배를 받고 제사를 받는다.
3. 단종신앙의 현장
단종이 민간신앙의 대상 신격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크게 나누어 산신, 서낭신, 몸주신이다. 전술한 바대로 산신과 서낭신은 동제의 신격으로서 등장하고 몸주신의 경우는 무당 개인의 신격이다. 동신으로서의 산신과 서낭신의 구분은 기능과 성격이 유사하여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대부분의 전통마을이 산간을 배경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편의상 산신과 서낭신의 본래적 의미로 구분하여 단종신앙의 현장을 찾아보고자 한다.
1) 단종 산신제
앞에서 기술한 바대로 영월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는 단종이 '태백산신'이 되었다는 속설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이는 단군이 죽은 후에 아사달의 산신이 되고, 강릉단오제에서 범일국사가 대관령국사서낭이며 김유신이 대관산의 산신이라는 경우와 흡사하다.
태백산 산신제
지금 태백산의 장군봉에는 단종비와 비각이 서있다. 그것을 세운이는 당시 망경사를 지키고 있던 김진정행이라는 여보살이다. 그녀가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단종이 현몽하여 "내가 태백산에 와 있으나 그 표식이 없으니 네가 비석을 하나 세우도록 하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보통 꿈이거니 하고 흘려 버렸으나 똑같은 현몽이 거듭되었다. 보살은 "아녀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아뢰었더니 "시작하면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가곤 했다. 할수없이 일을 시작해 보았더니 의외로 순조롭게 진척되어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으니 높이 2.0m, 폭 0.7m의 대평 비석을 1,500m의 험한 산길로 올리는 데는 32명의 장정이 목도로 15일이 걸렸으며, 게다가 비각까지 건축하느라고 어려움이 극심했으나 단종의 신통력으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 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라고 새겼고, 후면에는 한문으로 된 비명이 있다. 글은 당대의 고승인 탄허 스님이 짓고 글씨는 박윤규가 썼는데, 그 내용은 머지 않아 통일이 우리나라 만산의 중심인 태백산의 산신령인 단종의 위력으로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태백산 단종비각에서는 매년마다 태백산신인 단종대왕에게 정성껏 제사를 드린다. 그러한 관례는 전승하는 속설에 의하면, 단종과 접신한 장등불(張等佛)이라는 무당의 신통력에 기인한다.
새길령 산신제
태백시 혈리의 새길령 고개에는 단종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太白山山靈閣"이라는 산신각이 있다. 이 고개는 단종이 산신이 되어 태백산으로 갈 때 쉬어가던 길이고, 또 예로부터 보부상들이 자주 이용하던 길이다. 그래서 보부상들이 호환과 도적들의 피해를 면하고자 단종신을 산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드렸다.
제사는 매년 음력 4월 15일에 보부상들이 마련해 둔 3천여평의 당전(堂田)을 도지로 빌려준 돈으로 제물을 장만하여 지낸다. 여기서는 여신도를 궁녀, 남신도를 충신이라 부른다.
와석리 산신제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는 영월에서 태백으로 향하는 38번 국도에 인접한 마을로서 무릉동 혹은 들모랭이라는 1리와 기사리골로 부르는 2리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1리에 있는 마을의 산신당은 지금부터 200여년 전에 단종의 혼령이 태백산으로 가던 길에 잠시 쉬어간 자리에다 세운 것이라는데, "太白山神靈"이라고 쓴 위패를 모시고 있다.
당제는 정월 대보름에 지낸다. 정초에 생기복덕이 있는 2인의 제관, 제수를 마련하는 당주 1인, 축관 1인을 뽑는다. 경비는 마을의 기금으로 충당한다. 정월 14일에는 당집에 금줄을 치고 제관들은 목욕재계를 한다. 자정이 되면 제관과 축관 일행이 제물을 지고 당으로 가고 나머지는 마을회관에서 기다린다.
당집에 도착한 일행은 정화수에 숯을 놓아 그 물로 부정을 가리고 제물을 진설한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잔을 올리고 2배하고 또 잔을 올린다. 이 절차가 끝나면 축관이 마을 소지를 올리고 이어서 우마(牛馬) 소지를 올린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회관으로 돌아와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주민들은 단종서낭님이 영험을 주어서 마을이 평안 할 것으로 믿는다. 이 마을사람 중에는, 인접한 외룡리는 교인이 주도하여 서낭당을 태워버린 결과로 빈촌이 되었다고 믿는 분이 있다.
그리고 주민들은 단종신이 보여준 몇가지의 영험담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① 주민들이 단종을 모셔온 지가 200여년이 되어 그간 무사히 잘 살았으나 1968년쯤 영월군의 산림계장이 나와 서낭당을 뜯어버렸다. 그 사람은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말라가더니 마침내 죽고 말았다.
② 마을에 당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않자 아이들 3~4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가축도 병에 걸려죽고, 1972년에는 홍수가 나서 농사를 망쳤다. 그래서 이듬해에 주민들이 회의를 하여 당을 세우기로 하고, 신대가 이끄는 대로 가보니 옛날의 서낭당 자리였다. 거기에 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니 마을이 다시 평안해졌다.
③ 6.25전쟁 때 전장으로 끌려가게 된 마을의 김종하ㆍ고인규 옹은 모친이 시키는 대로 정화수와 주과포를 당에 바치고 정성으로 빌고서 갔는데,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 정성을 드리지 않고 간 다른 이들은 다치거나 죽었다.
④ 김종하 옹의 이모부가 제물로 쓰려고 지목한 제일 큰 닭을 아깝게 여겨 작은 닭으로 잡았더니 큰 닭이 갑자기 죽고 말았다.
⑤ 평양에서 피난을 온 사람이 꿈에 단종이 현몽하므로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드렸다. 꿈에 단종이 다시 현몽하여 이르기를 "나를 정성으로 위하니 고맙다"면서 사라졌다. 그후에 그는 군부대에서 군용차를 임대하여 화물사업을 시작하여 크게 성공해서 서울로 갔다.
녹전리 산신제
영월군 중동면 녹전리의 상유전에는 산신당(서낭당)이 있었으나 중학교가 들어서고 1972년 새마을사업을 전개하면서 철거하였다. 이당에서는 단종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날을 기하여 성황대제를 거행하였는데, 주민들이 성금을 염출하여 소 한마리를 잡고 한마당 잔치를 벌였다.
지금 그 제의의 모습은 사라졌으나 단종에 얽힌 갖가지의 설화가 여전히 생생히 전하므로 그것을 통해 단종신앙의 면모를 알아 볼 수 있다. 몇 가지의 사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한번은 소를 잡아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술취한 젊은이가 그 쇠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러자 젊은이의 입이 갑작스레 붙어버려서 말도 못하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단종의 혼령께서 괘씸히 여긴 탓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또 소를 잡은 뒤 내장을 앞개울에다 버렸더니 까마귀가 그것을 먹고 날다가 떨어져 죽은 예도 있었다. 이런 일이있던 후부터 제사르 치르기 전에 제물을 먹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또 산우리에 사는 한 젊은이는 짓궂은 친구들의 장난으로 개고기를 돼지고기로 알고 먹은 후 서낭제에 참여하였다가 코피를 흘리면서 넘어졌다. 모두 놀라며 그를 업고 집에 가서 치료하였으나 좀체로 회복되지 않다가 40여일만에야 겨우 일어났다. 그의 부친이 엄동설한인데도 목욕재계하고 40여일을 하루 같이 서낭당에다 치성을 들인 덕이라고 하였다.
② 이 서낭당에는 원래 군대가 주둔하였었는데, 시계(視界)를 가린다고 서낭당목 10그루를 베었다. 그때부터 호랑이가 밤마다 출몰하여 보초를 설 수 없었다. 보다 못한 마을사람들이 서낭당에 치성을 올렸더니 그날 밤부터 조용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6.25때 인민군대도 이곳 서낭당 부근에 주둔하였는데, 겨울철에 땔감이 없어서 서낭당목을 베어 불을 땐 일이 있었다. 그후 그들은 '서기산 전투'에서 전멸하였다. 일제시대에 서원(西原)이라는 주재소 주임은 서낭당 괴목을 베어 관사의 상주로 썼더니 집안식구가 모두 병으로 눕게 되었으며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점장이와 무당을 불러 들여 경을 읽고 굿을 한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③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서낭당을 철거할 때의 일이다. 당시 서낭당을 불질러 태워버렸는데, 그때 참여한 사람 하나는 5년 후에 정신이상으로 음독자살하였고, 또 한 사람은 살림이 망해서 이주해 버렸다.
어평 산신제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에 어평(御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단종 혼령이 산신령이 되어 태백산으로 가실 때 쉬어 간 곳이라 하여 모실 어(御)와 벌판 평(坪)자가 붙어서 된 지녕이다. 이 마을에는 단종의 영각(靈閣)이 있어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검정색 돼지를 잡아 제수로 쓴다. 일제때는 광산업으로 흥청거렸으나 지금은 폐광으로 한산한 농촌이 되어버린 이 마을은 하천이 한가운데로 흐르기 때문에 영월의 어평과 태백의 어평(태백시 고한읍)으로 나뉘어 있다.
태백의 어평 주민들은 큰골과 당목재로 갈라지는 곳에 '단종각'이라는 당집을 지어놓고 단종을 위한다. 또 단종이 꿈에서 지시한 대로 마을의 뒷산에다 할머니당을 짓고 제사를 드리고 있다. 단종각 옆에는 커다란 '엄나무'당목이 서 있는데, 단종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낸 충신 엄흥도의 화신으로서 당집을 보호하고 잡귀를 쫓아낸다고 한다. 당집에는 '端宗大王之神位'라고 쓴 위패가 모셔있고,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당고사를 지낸다. 당주는 제수비용을 추렴하고 그 내용을 축원방에다 기록한다. 여기에 기록된 인명에 따라 소지를 올려준다.
제사는 당주의 집에서 마련한 삼색 과일과 나물 및 생선 그리고 새옹메를 지게에 지고 당집으로 간다. 가기 전에 부정을 씻기 위해서 당주의 집 앞에 피워놓은 모닥불을 타넘고 간다. 제주는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운 후에 제물을 진설한다. 그리고 단종의 강신을 청하여 헌주하고 축을 읽으며, 주민들 모두가 재배를 한다. 이어서 소지를 올리는데, 대왕님 소지, 마을 소지, 개인 소지 순으로 올린다. 소지가 끝나면 당산숲을 돌면서 술을 뿌려 잡신들에게 풀어 먹인다. 그리고 모닥불가에 모여서 음복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제반 마을 일과 내년도의 당고사에 대해 상의 한다.
한편 주민들 3~4명은 단종각으로 오기 전에 마을 뒷산에 있는 할머니당으로 가서 유사한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연하리 산신제
영월읍 연하리 두평마을은 엄씨의 집성촌인데, 예로부터 단종과 충신의 제사를 지내온다. 전에는 단종의 화상이 있었으나 없어졌다. 지금은 단종의 영정 대신에 1978년에 주민이 그렸다는 호랑이와 함께 있는 남녀산신의 화상이 봉안되어 있다. 화상의 옆 벽에는 도포차림의 무사가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의 화상이 있다. 이는 산신을 호위하는 수비(수부)장군이라고 한다.
제사는 정월 초사흘이다. 그때는 먼저 다안숲에 있는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어서 서낭목에다 당제를 지낸다.
도계리 산신제
삼척의 도계읍 도계4리에는 6.25동란 때까지만 해도 행로의 안전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태백산 산신령이 된 단종의 영정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마다 제사를 지내었다. 이곳의 당은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서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찾아와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도계4리 17반에는 태벽사(대한불교 원륭종)라는 암자가 있는데 여기의 여승은 영월의 보덕사처럼 단종을 모시고 있다.
고치령 산신제
경상북도 영풍군 단산면 마락리에서 좌석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고치령이다. 충북과 경북의 도계인 마락리는 성재ㆍ흠통골ㆍ칠목이ㆍ법수동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폐교된 마락초등학교는 청소년 수련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치령은 예전에는 강원ㆍ충북ㆍ경북을 넘나들면서 장사를 하던 장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충북 영춘면 의풍을 지나 마락리에서 고치령을 넘으면 경북 영풍군 단산면 좌석리를 지나 순흥으로 갈 수 있다.
의풍에서 20여리쯤 떨어진 이곳 고치령 산마루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산신각이 있는데, 태백산신령이 되었다는 단종과 소백산신령이 되었다는 금성군의 위패를 나란히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백마를 타고 있는 태백산신령인 단종과 호랑이를 타고 있는 금성대군의 화상이 있었다. 고치령 산신제는 조선중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영춘 현감과 순흥 현감이 참여하였으며, 영험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렸다.
산신각은 6.25때에 소실되었으나 주민들이 중건하였다. 백마를 탄 단종과 책을 들고 서 있는 금서대군의 영정이 감실에 안치되어 있다. 산신각의 <중건기>(太小白山古峙嶺神靈閣重建記)에는
"영월의 단종대왕은 태백산신령이요, 흥주(순흥)의 금성대군은 소백산신령인데, 이 두 산신을 모시고... 동민들이 숭배하니 마락동을 잘 수호하여 주시옵소서.(寧越之端宗大王 爲太白山之靈 興州之錦城大君 爲小白山之靈奉安兩位... 馬落洞民崇守護)라는 기록이 있다.
2) 단종서낭제
최영ㆍ남이ㆍ임경업 등 한(恨)을 품고 죽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신령으로 모셔지듯 단종도 죽어서 태백산신과 서낭신이 되었다. 특히 단종은 영월의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피살당하였으므로 인근에는 그에 대한 구전설화가 많고 또 신격화되어 신으로 모셔놓은 곳이 많다. 단종을 서낭신으로 모시고 지내는 제사로는 영모전, 내리, 청령포, 여량리(정선)등의 서낭제가 있다.
영모전 서낭제
영월읍 영흥1리 을지산 기슭 위에 있는 영모전(永慕殿)에서는 영월의 축제인 '단종문화제' 때와 음력 10월24일 (단종대왕 승하일)이면 해마다 제향을 올린다. 영모전은 원래 신목(神木) 하나만 있던 당집이었으나 현재는 단청이 잘된 기와집에 단종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놓고 있다. 제수(祭需)는 읍장이 준비하고, 군수와 유림대표가 헌관이 되며, 추익한의 후손들이 제사의 온 과정을 맡아서 진행한다. 그렇더라도 평소에는 민간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신성공간이다.
영모전이 건립된 것은 노산군묘를 왕릉으로 복원하고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된 숙종 24년(1698)쯤인데, 당시 영월의 주민들이 단종의 불행한 영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성을 모아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영모전에는 김기창 화백이 그린 단종의 영정을 모셨는데, 단종이 곤룡포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있고 그 옆에 갓 쓴 선비 추익한(秋益漢)이 산머루를 단종께 진상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오랫동안 영모전을 관리하여 온 김기만 씨는 매년 정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드리고, 자택에도 단종과 태극기를 모시고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
어느 해에는 영모전에서 음력 7월 호무시시(호미씻이)를 놀게 되었다. 농악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물을 영모전 제단에 차려놓고 잔을 올리려고 하는데, 어떤 술취한 사람이 '내가 먼저 먹겠다'면서 술잔을 가로채어 마셨다. 그 사람은 그날 저녁에 원인 모르게 죽었다고 한다. 또 영월경찰서에 근무하는 어느 간부에게 단종이 자주 현몽하여 영모전 경내를 자세히 조사해 보라고 하므로 조사하였더니 6.25사변 때의 북한군 시체가 영모전 마루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의 전승은 그곳이 신성하고 신령한 곳임을 증거하는 사례이다.
내리 서낭제
영월군 하동면 내리(內里)의 지동 마을과 조재 마을에서는 각각의 서낭당에서 단종을 위하는 서낭제를 지낸다. 지동의 당집은 내리분교에서 150여m쯤 안쪽으로 들어간 개울가에 있는데 당집이 2개이다. 하나는 단종을 모시고 있고, 다른 것은 단종을 보위하는 수부(수배)인 '서낭신위'를 모시고 있다. 주민들은 전자를 큰당, 후자를 작은당이라 한다.
큰당은 20여년 전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작은당 옆에다 다시 지은 것이다. 큰당의 제단 위에는 위패나 영정은 없고 대신에 40cm정도의 입석이 고깔을 쓰고 있다. 주민들은 이돌을 '대왕님' 혹은 '돌서낭'으로 부르고 단종의 신체(神體)로 삼고있다. 큰당이 무너졌을 때 입석을 찾지 못했으나 고사를 드리고 정성을 기울인 결과 찾을 수 있었고, 신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니 작은당 옆에서 멈추는지라 그곳에다 당집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큰당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서 걸어갔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나 사람의 발굽이 떨어짖 않았다는 것이다. 군왕에게 예를 갖추어야 함을 강조한 전설이다.
아래쪽의 작은당은 서낭당 혹은 '수부당'이라 한다. 송판에 '城隍之神位'라고 쓴 위패가 있다. 수부(수비)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단종신을 호위하는 신격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속신앙에서 수부는 신을 수행하는 하위 신격을 지칭한다.
제사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흩날 자정 무렵에 치른다. 2~3일 전에 제관 3인, 당주 1인, 유사 2인을 선정한다. 제관은 헌주하고, 당주는 제수를 만들며, 유사는 제사에 필요한 경비를 추렴하여 제수를 준비하고 제물을 진설한다. 당집과 당주집에는 금줄을 친다. 당주집에서는 주과포혜와 돼지머리, 생닭 그리고 두 신령인 단종과 수부에게 바칠 밥 2솥을 준비한다. 떡은 백미 3되3홉을 맞추어 장만한다.
제사는 큰당에서 먼저 시작한다. 당집에다 모닥불을 피우고 잔을 올리며 축을 읽는다. 그리고 2번씩 절을 한다. 이어서 "단종대왕님 응감하시었습니까"하고 대왕 소지를 올린다. 소지가 잘 오르면 제사가 잘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을소지, 개인소지를 올리고 우마소지도 올린다. 소지의 귀퉁이가 타지 않고 떨어지는 경우를 '책지진다'고 하는데 그때는 다시 올린다.
큰당의 제사가 끝나면 작은당으로 제사상을 옮기어 제사를 지낸다. 메와 술만 새로 올린다. 잔을 3잔 올리고 모두 재배한다. 그리고 "수부님 응감하시었습니까"하고 여쭙고 소지를 올린다. 상당 보다는 아주 간단하게 지낸다. 제사가 다 끝나면 개울가에 모여 음복하고, 당주의 집으로 와서 찰밥을 먹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한다.
예전에 당고사를 지낼 때는 옆 마을과 돌싸움(石戰)이나 신대(神竿)싸움을 벌였다. 신대는 4m정도의 장대 끝에 꿩장목을 달고 방울을 묶었다. 이 신대를 가지고 주변 마을과 대 싸움을 벌였으며, 특히 외룡리와 싸우면 꼭 이겼다고 한다. 옆 마을 외룔리는 최영 장군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임금(단종)의 대가 신하의 대보다 센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청령포 서낭제
청령포와 마주보고 있는 마을인 영월읍 '방절리'의 명칭은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 절개를 지키던 충신과 시녀들이 살았던 곳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다. 이 마을은 청령포를 포함하여 마굿ㆍ잔다리 마을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서낭제는 원래 마굿에서 지냈다. 지금은 5반 사람들이 청령포로 가서 단종제사를 지낸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광천리)에는 당집이 없으므로 유지비각(遺址碑閣)에서 지낸다. 제사는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제관 1인, 제수를 마련하는 반장, 축관 등이 청령포로 가서 유지비 제관 1인, 제수를 마련하는 반장, 축관 등이 청령포로 가서 유지비 앞에 주과포혜와 쇠고기, 산적, 채소 등을 진설하고 지낸다. 먼저 제관이 초를 켜고 향을 사른 후에 잔을 부어 강신을 청하고 4번씩 절을 한다. 그리고 전승하는 문장인 <단종대왕제사 축문>을 읽는다. 이어서 아헌, 종헌 순으로 잔을 올리고 4배를 한다. 그리고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먼저 제사를 족히 받으셨는지를 묻는 '대왕소지'부터 올리고, 마을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올린다. 소지가 잘 오르지 않으면 한번 더 올리고, 그래도 오르지 않으면 매사를 조심하여야 한다.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반장집으로 돌아와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대왕각 서낭제
청령포와 강 사이에는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상의 절벽이 있고, 거기(영월읍 하송6리 5반)에 단종의 영혼을 위무하기 위한 당집인 '대왕각'이 (사방 9자씩 3칸)이 있다. 그 안에는 백마를 타고가는 단종의 영정과 대왕각의 주인인 김장수만의 부모사진이 있다.
대왕각은 1957년에 녹전리 출신의 김이봉이라는 여인이 꿈에 친정아버지의 계시를 받고 지은 당집이다. 그녀가 37세가 되던 해에 친정하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밤마다 꿈에 나타나 '이봉아, 청령포 절벽 위에 사당을 짓고 단종대왕니을 잘 모셔야 복을 받을 수 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살림이 여의치 못해 생각도 내지 못하자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백방으로 노력하여 선친의 지시대로 대왕각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극진히 모셨더니 병이 씨은 듯이 나았다.
그녀는 아예 대왕각에서 생활하면서 단종의 계시를 받아 강물속에서 상석을 찾아내어 단종의 부모님 이름을 새겨 대왕각 앞에 모셨다. 그후 그녀는 단종의 계시로 산삼 12뿌리를 캐어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을 당시의 부통령인 이시영에게 보내어 찬사를 받았다. 1984년에 83세로 유명을 달리한 그녀는 대왕각 앞에 묻힘으로써 죽어서까지 단종을 모시고 있다. 그런가하면 그녀는 아들 김장수만의 꿈에 현몽하여 "단종이 귀양오던 길을 따라 그 분의 자취를 찾아보라"고 하여 이씨는 3차에 걸쳐 도보로 답사하였다.
김장수만(金張壽萬)은 1943년 3월 15일(음력) 08시20분출생이다. 그는 부친 김종대(1987년 졸)와 모친 김이봉(1984년 83세 졸)의 사이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름이 장수만이 된 내력은 모친이 장수만이 출생하던 날 새벽에 친정아버지가 나타나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정하고 한자까지 알려주어서 지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꿈에 이르기를, 출산 후에 태를 대왕각 건너 장군봉에 묻되, 태를 놋대접에 담아 뚜껑을 덮고 큰 단지에 다시 넣은 후 창호지로 3겹 싸고 또 무명실로 7번 돌려 매듭을 지어 묶은 후 묻으라고 해서 그대로 하였다. 김장수만 씨는 현재 대왕각 옆에 집에서 홀로 기거하면서 단종대왕의 기일에 제사를 지낸다. 또 대왕각에다 부모님의 영정을 모시고 기일에 역시 제사를 지낸다. 그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외출을 삼가고 집안에서 조신하며 지낸다.
여량리(정선) 서낭제
정선군 북면 여량1리의 서낭당에는 '노산군신위 魯山君之神位'를 모셨다. 이 마을에서 단종을 서낭신으로 모시게 된 사연에는 3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어 있을 때 연을 만들어 날린 일이 있었는데 그 연이 여량의 서낭당목에 걸렸다. 이 일을 상기한 마을 사람들이 단종의 승하 후에 서낭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단종이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원사했을 때 금강에 버려진 시신이 여량에까지 흘러 내려와 걸렸기 때문에 이곳에다 모셨다는 것이다. 끝으로는 왜가리 서낭당에서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주민들이 당굿을 하고 있는데, 그때 영월에서 날아온 연을 보니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폐위됨을 슬퍼하여 '노산군'이라고 쓴 글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서낭당을 짓고 춘추로 단종 서낭제를 올렸다고 한다.
서낭제는 3월초와 10월초 두차례에 걸쳐 지내는데 날을 받아 '청수'의 지시에 의해 지낸다. 청수는 마을의 장로격으로 이장과는 달리 동제라든가 마을의 상사(喪事)와 각종 계를 관장하며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서낭당도 관리한다. 제사비용은 마을에 축적된 공동 재정으로 부담하며, 제관으로는 이자오가 청수 그리고 유지가 되며, 제물은 주과포(酒果脯)와 메ㆍ떡 등을 쓴다. 축문을 읽고 복자가 축원하며, 마을 공동의 소지 및 가가호호의 소지도 올린다.
이곳 여량리의 서낭당에 모셔진 '노산군'의 위패에는 신이한 전설이 전승한다. 숙종 24년(1698) 묘호(廟號)가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원되자 서낭당에 봉안되어 있는 '魯山君之神位'라고 쓴위패를 '端宗之神位'로 바꾸어 써서 모셨더니 마을에 괴질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앓아 누웠다. 그때 한 노승이 나타나 이르기를 서낭당 위패를 원래대로 바꾸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그후부터 질병이 없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당집에 「端宗大王神位」라고 쓴 위패가 모셔져 있다.
3) 단종대왕 한풀이굿
굿의 절차
한국의 무속에서는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을 신격으로 모시는 것이 상례이다. 최영ㆍ남이ㆍ임경업ㆍ명성황후 등 한을 품고 죽은 사람들이 신령으로 모셔지듯 단종도 죽어서 서낭신과 산신이 되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억울하게 비명횡사했을 때는 한이 맺혀 귀신이 된다. 따라서 산 사람들은 그를 영원히 존재하는 신령으로 살려야 할 의무가 있고, 그 댓가로 그 신령으로부터 수호와 가피를 받는다. 그것이 한국인의 종교적 전통이며 보편적 정서이다. 그래서 단종은 죽어서 민간과 무속에서 받드는 군왕신(君王神)이 되었다.
단종을 향한 신판은 유교식 고유제 외에도 한풀이굿보존회가 주관하여 단종대왕의 넋을 위무하는 무교적 '한풀이굿'이 매년 단종제 때마다 장릉의 잔디밭에서 벌어진다.
이 한풀이 굿은 서울 종로구 필운동 무속연구원의 국사당 '한풀이굿보존회'가 주관하고, 회장인 강귀옥 무녀가 주무(主巫)이다. 서울의 국사당에서는 단종의 영정을 모셔놓고 1990년부터 정월에 택일하여 굿을 올리고 있으며, 이를 확대하여 단종문화제에서도 올리게 된 것이다.
장릉에서의 한풀이굿은 단종의 넋을 달래어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이어서 조선왕조의 기틀을 이룬 태조와 중전 강씨, 단종의 어머니 권씨, 단종의 왕후 송씨, 사육신 및 생육신 등의 원한을 달래고 풀어 준다. 그리고 단종을 따라 순절한 시녀들과 단종을 보필했던 장군들의 영혼을 위무한다. 이때의 굿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강씨부인>은 태조를 내조하다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자신은 물론 2명의 아들까지 피살당한 비운의 왕비인 강비의 영혼을 위로하는 굿이다. 강귀옥 무녀가 갑사 치마저고리를 입고 등장하여 우아하게 왕비춤을 춘다.
<권씨중전>에서는 강 무녀가 모자는 쓰지 않고 붉은판에 봉황을 수놓은 도포를 입고 등장하여 춤을 춘다. 문종의 부인인 권 중전은 타고난 체질이 약하여 단종을 낳고 이틀만에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데다가, 죽은 영혼이나마 아들을 구하려고 대신들의 꿈마다 나타나 공수를 주었지만 끝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가는 비운의 왕비다.
<단종대왕>에서는 강 무녀가 노란색 용포와 왕관을 쓰고 나와 아주 천천히 의젓하게 왕춤을 춘다. 여기의 춤은 손놀림을 주로 한다. 그러다가 검을 들고서 역동적으로 춤을 춘다. 이윽고 칼을 내려놓으면 다시 평이하게 춘다. 이는 단종의 분노를 칼로써 표현하고, 그것이 끝나면 위로를 받아 한을 삭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송씨중전>에서는 강 무녀가 청색도포를 입고, 흰색의 긴 베포를 들고나와 동대문 밖 정업사에서 영월쪽을 향해 일편단심을 보내다가 82세로 죽은 단종 비 송씨의 영혼을 위무하는 춤을 춘다.
<궁중장군ㆍ작두신장>에서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등장하여 작두 춤을 춘다. 김종서와 황보인 등 장군들은 평소에 단종을 잘못 모신것을 후회하며 죽었다. 춤에서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 넋을 위로 한다.
<대감거리>에서는 붉은 도포를 입고 등장하여 바라춤을 춘다.
빨주노초의 개의 깃발을 들고 역동적인 춤을 춘다. 당시 충성을 다하다가 죽음을 당한 대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춤이다.
<궁중대신거리>에서는 단종을 따라와 시봉하고 그 영혼을 위로코자 애를 쓰고, 또 목숨을 나고하암에서 버린 일곱 분의 넋을 위로하는 굿거리이다.
<대감ㆍ신장ㆍ별신ㆍ대장>은 대감, 불사, 장군, 신장, 창부, 대신 등을 간단히 위로한다. 이때는 제단에 올렸던 밤ㆍ대추ㆍ떡 등을 여러 귀신에게 풀어 먹이고 관객들에게도 나누어 준다.
1996년의 단종대왕굿도 장릉에서 공연되었다. 굿의 절차는 이듬해와 거의 같다. 주무의 작두타기와 깃대점치기 및 보조 무당의 살대세우기가 특히 관중의 관심을 끌었다.
무녀 강귀옥
한풀이굿의 주무(主巫)인 강귀옥은 충남 아산 출신의 강신무로서 '벼슬대감'이 내려 굿을 하게 된 무당이다. 그녀는 8년 전 태백산으로 가던 중 영월에서 단종신이 내려 대왕굿을 하게 되었다. 서울 상도동에서 사는데, 단종신이 경복궁이 보고 싶다고 해서 경복궁 옆의 필운동으로 아예 이사를 해서 살고 있다. 그녀의 신당인 국사당에는 대왕굿을 할 때 모시는 단종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국사당에서 대왕굿을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한다. 그녀는 단골이 많은데, 그들은 영월에서 대왕굿을 할 때도 함께 따라와 참여한다.
강귀옥이 1994년 관풍헌에서 대왕굿을 할 때의 언급을 들어보자.
『나는 충남 태생으로 올해 52세의 강신무입니다. 산천기도차 태백산으로 가던 중 영월읍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꿈에 단종대왕이란 분이 나타나시어 눈물을 흘리며, "나는 슬픔과 한이 천추에 맺힌 고혼이 되어 이 고을을 떠돌고 있으니 해마다 한번씩 한을 풀어준다면 편히 쉬겠노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연약한 무녀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이 일을 어찌할까 고민끝에 이는 오직 무녀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매년 한풀이굿을 해 드릴 것을 작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영월영모전에서 단종대왕의 영정을 저의 법당에다 모셔놓고 음력 정월이면 좋은날을 택일하여 서울국사당에서 계속 3년을 한풀이굿을 하여 드렸습니다. 다시 꿈에 웃는 얼굴로 나타나시어 "고맙다, 고맙다"고 연발하시며, "나의 유배지인 청령포에서 굿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작년(1993년 4월 5일)에 사재를 털어 청령포에서 굿을 해드렸습니다. 금년에는 군청기관 여러분과 단종위원회 여러분의 도움으로 이곳 관풍헌에서 행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단종신을 몸주신으로 받아들이고 계시에 따라서 복식과 음악을 바꾸어 대왕굿을 하였다. 첫현몽 때에 15세쯤 되는 신이 들어오는 느낌을 가졌고, 그때부터 임금님을 '놀리게'되었으며, 영월에서 굿을 하게 되어 소원을 풀었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하고 싶단다. 그러나 굿 중에 궁중음악에 해당하는 삼현육각의 연주를 해야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비용이 많이 드는 드는 것이 어려운 점이라 한다.
무녀 김춘자
현재의 대왕굿은 강귀옥이 주도하여 행하나 이보다 훨씬 앞서 덕포리에 거주한 무녀 김춘자가 1981년도 제15회 단종제 때부터 1986년 제20회 단종제까지 6회에 걸쳐 '태백산신령굿'이라 해서 금강공원과 관풍헌에서 벌이었다. 김씨는 장군신의 주력을 통해 단종 중심의 제의를 진행하여 왔는데, 그때의 굿거리는 장군신 축원 - 열두산 살풀이 - 살귀신 몰아내기 - 돼지머리 세우기 - 장군신 송사 순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대왕굿은 왕신 또는 산신의 영험성을 믿은 마을굿에서 출발하였으나 역사속의 '한'의 대명사처럼 된 단종신을 통해 신이성에 의존한 개인굿의 성향으로 바뀌고 이것이 다시 재수굿판에서 연행ㆍ전승되다가 단종문화제의 행사 중 하나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영월은 소설 <단종애사 端宗哀史>의 본향이고, 단종으로 인해 여러 충신들이 존재했기에 '충절의 고장'으로 호칭한다. 영월의 대표적인 이미지 메이커인 단종은 대대로 단종제의 주신(主神)으로서 官의 제향을 받아왔으니 금년으로 315회째이다. 현재는 '단종문화제'(2002년 36회)라는 지역축제 중에 단종제향을 봉행한다.
일찌기 단종에 대한 제향은 충효를 숭상하는 한국인의 유교적 가치의 표상에서 비롯한 관변 위주의 제사로 머물지 않고 민간신앙화되어 동제로 또는 무당의 굿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단종을 신격화한 것은 그가 지존의 몸으로서 한의 눈물영웅이 된 때문이다. 한국인의 신앙적 정서는 '한풀이'가 근간이다. 한을 풀어주고 위하면 반대급부로 무사안녕과 풍요를 보장받는다는 공리적인 사고가 지배적이었으므로 단종을 비롯하여 최영, 남이, 명성황후, 임경업, 마의태자 등 한이 맺힌 주검을 당한 인물들이 신격으로 숭배되었다.
민간에서의 단종신앙의 제사는 동민들의 동제와 무당의 개인적인 제사로 구분된다. 동제는 서낭제와 산신제로 나타나고 무당의 개인제사는 굿이나 치성으로 나타난다. 단종은 죽었으되 그 영혼은 제의를 통해 오래도록 살아있을 것이다.
한편, 단종신앙은 영월의 민속놀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월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칡줄다리기'는 단종이 피살되어 억울하게 생을 마치자 향민들이 단종에 대한 동정과 울분을 달래기 위한 해소책으로 생겨난 놀이이다. '능동마을 도깨비놀이'는 장릉마을인 능동사람들이 단종을 추종하고 추대하던 충신들간의 충성심과 충절을 표현하는 놀이이다. '띠놀이'역시 촌로들이 닭띠인 단종의 억울한 인생을 생각하다가 각 띠끼리 서로 자랑하는 내용으로 만들어진 놀이이다.
230-805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2 TEL : 033-373-3434 FAX : 033-373-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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